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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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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

강민형

큐레이터, 예술계 통번역가(영,일,한)로 활동 중이다. 탈중심적 예술 실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바림》 (광주광역시, 2014-2024)을 설립하여 지역에서 활동하고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해당 지역성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 활동을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했다. 이 초지역성과 자율성을 디지털 기술의 문맥에서 읽고 디지털 기술을 다루는 예술의 다른 형태를 고민하는 《DEGITAL》 플랫폼을 만들고 운영한다. 현재는 예술-기술-사회의 접면에서 발생하는 현상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는 《포킹룸》의 공동운영자이다. 202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펠로우 큐레이터로 선발되었다.

@barimgwangju

<최소의 지정학 Minimal Geopolitics> (2023)

Q. 오늘은 바림(Barim)의 디렉터이자, 큐레이터, 통번역가로 활동하고 계시는 강민형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카이브:노아>의 기획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었지만, 바림 레지던시에 합류하여 <최소의 지정학>[1](2023)이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시간이 결정적인 축을 제공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플랫폼이라는 말을 생각했을 때 가장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얼굴이기도 했고요. 안녕하세요 민형님, 웹상에서라도 오랜만에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A. 최근에는 해외로 잠시 기반을 옮겨서 기존에 하던 일로부터 멀어져서 살아보고 있습니다. 저 자신의 역사와 거리두기 중입니다. 한 가지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전문성이 생긴다는 것이지만 그만큼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아이러니를 체감 중입니다.

  1. [1]광주광역시에 위치한 예술공간 바림에서 열린 리서치 레지던시/공공 프로그램 https://barimart.wordpress.com/2023/05/09/minigeo_pub/

Q. 그러시군요. 아이러니라니 혹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A. 예를 들어서 10년 동안 예술 공간을 운영했다고 하면 서영님은 무슨 생각이 먼저 드시나요? 제 나름은 그 안에서 다양한 일을 했었고, 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은 다면적인 요소를 포함한다고 느끼거든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이죠. 공간 운영을 기반으로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인이라면 그냥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사람한테 다른 일을 시키려고 안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뭔가 전문가처럼 깊이를 파면 면적은 좀 좁아지는 느낌, 꼭 미술만 그런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견디며 계속 파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인가 봐요. 하나를 잘해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 모두가 어떤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잖아요. 자기만의 것을 하려고. 특히 예술계는 그런 경향이 강한데, 그게 꼭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내가 잘하는 것이 나이 들수록 내 제약이 되는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한참 빌드업해야 될 때랑은 좀 다른 느낌이 들어요. 빌드업을 한 이후에는 계속 높게 쌓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게 점점 면적은 좁아지고 하늘에 붕 뜬 느낌이 들어서 아이러니 같다는 생각이네요. 맨 꼭대기로 가면 좋을까요?

Q. 어떤 말씀인지 가늠이 되네요. 지금은 선생님이 뉴욕에 계시지요. 광주에 위치해있었던 기존 바림의 물리적공간은 정리를 하셨고요. 사실 바림이 광주에서 10년 동안 실험해왔던 거주(Residency)의 시간은 예술가가 머무는 시간임과 동시에 생성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엔 2023년에 진행되었던 바림의 탈현지화 프로젝트, <최소의 지정학>을 경유하며 로컬이라는 말이 통째로 은유가 될 수 있음을 배웠어요. 무엇보다 바림의 10주년 도록[2]에 필진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그 당시 에세이 마감을 위해 엮어보았던 이런저런 생각의 타래가 바로 이 웹진 <아카이브:노아>라는 이름을 짓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해봅니다. 그 글(「피부로 만든 책과 하코부네」)[3]은 테라야마 슈지의 <안녕 하코부네>(1984)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링크하며, 이곳과 저곳 사이의 간극에서 이동하는 투명한 방주로서의 예술을 이야기해보고자 했던 시도였어요. 존재론적인 이동 사이에서 가능한 휴식의 상태를 말하고자 하기도 했고요. 바림(Barim)은 지금 어떠한 종류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입니까?

A. 예술 공간의 지속 가능성은 무엇일까요. 지속 가능성은 재밌는 단어같아요. 환경 문제와 같이 기존의 경제 체제와 반대되는 개념에서 쓰이기도 하는데요. 가령 인류, 환경, 비인간 동물, 식물 등의 지속 가능성처럼. 동시에 자본주의의 선두에 서 있는 기업들도 그 단어를 쓰고 있으니까요. 계속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모든 경제 환경이 그런 것처럼 예술계도 점점 양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미 부자인 컬렉터들은 더 부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작가들은 더 기회를 얻기 어렵죠. 많은 작가나 큐레이터가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고, 유학을 다녀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이었죠. 당시에는 어떻게든 더 잘살아 보려고 하는 학위 취득과 유학 생활도 지금 생각하면 무슨 대단한 예술을 위해 그랬나 하는 느낌이구요. 스타 큐레이터, 작가의 탄생이나 이동/여행, 특히 북반구 선진국의 진출 여부가 이제는 예술의 지표입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양극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특히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비해 선진국에의 열망, 발전주의에 대한 환상이 더 많은 한국에서, 그리고 서울도 아닌 광주에서 예술 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에 대해서 부감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10년의 성과라면 그런 것일까요. 그런 사실을 피부로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큰 세상 속의 작은 물고기가 되어 살갗으로 그 미미함과 콤플렉스를 경험 중입니다.

  1. [2]바림의 10주년 기념 도록 https://barimart.wordpress.com/randomrecord/
  2. [3]이서영 작가의 에세이 https://barimart.wordpress.com/lee2/

Q. 사실 예술공간, 플랫폼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몇 번 이야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지요. 어쨌든 제가 광주에 거주하며 가장 익숙하게 여겼던 플랫폼이라면 직장으로 두고 있는 광주극장, 동료작가들과 함께하는 문학동인 공통점, 약 3개월간 레지던시 작가로서 함께 했던 바림 이렇게 세 가지가 의미 있는 엮임이었달까요. 그런데 플랫폼 그 자체가 프로젝트성으로만 이어가는 것 말고, 새롭게 해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형태의 지속가능성이 있는지 한번 자문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금 망망대해 같은 느낌이 있기도 했거든요. 혹시 말씀 주신 지속 가능성에 대해 더 보태서 설명해주실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A. 사실 지속 가능성은 선형적인 개념으로 많이 쓰잖아요. 10년이 되었다, 20년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그건 비가역적이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그 선형적인 감각으로만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하면 10년 버텼네, 20년 버텼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 안에 콘텐츠적인 것 있잖아요. 지속가능성에 포커스를 놓다 보면 뭘 하면서 지속했는가라는 질문은 놓치기 쉬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환경 운동을 예로 들어 볼까요. APEC 경주 있잖아요. 그 지역에 큰 산불이 나서 나무가 다 타서, 어떤 업체가 그것을 재활용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앉을 의자를 만든다, 라고 하는 기사를 봤거든요. UN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도 있고, 미국이 파리 협정을 탈퇴하기도 해서 중요한 이슈이긴 한데, 그 업체는 친환경적인 가구를 만든 적도 없고, 결국 그 나무를 다 갈아서 합판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무를 다 갈아서 본드로 붙이는 것은 전혀 친환경적이지 않아요. 놀랍게도 나무를 재활용했다는 것만으로 친환경이 되더군요. 업사이클링을 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업사이클 하는데 환경을 더 파괴하는 그런 느낌이잖아요. 지속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는 선형적인 개념으로만 사람들이 보는 것 같아요. 오래 쓰고, 이걸 또 쓰고 이런 식으로 아직 그 '아나바다' 수준에 멈춰있는 거죠. 예술 공간도 그렇게 생각하면, 10년 했다 20년 했다. 지속가능했다 이렇게 쉽게 결론 지어질 수는 있겠지만, 10년 어치를 누군가는 2년 만에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2년이나 10년을 무엇으로 비교하냐에 따라 단가 차이도 있을 거고요. 그런 단가 계산, 단위 전환 같은 것도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해야 할까요. 한국말이나 영어의 'sustain'이라는 말 자체를 처음과 끝이 있는 의미에서의 길이, 즉 비가역적인 선형적인 길이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답답합니다. 예술 공간을 운영하다 보니까 그게 전부는 아닌 느낌이 들긴 했어요. 바림이 10년 했다니까, 10년이라는 숫자가 중요한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알기 쉬운 기표에 불과하죠. 지속 가능성의 다면성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러려면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어요. 이미 지속이라는 말 자체가 하던 것을 계속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단어 자체가 약간 우리의 사고를 구속하네요. APEC 트럼프 의자 만들기 같은 사고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요. 정답은 없지만.

Q. 그러게요. 단순히 오래 해야지, 이런 것은 별로 큰 의미는 없는 것 같고 여러 맥락에서 고민이 진행되어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유형과 양상이 효과적인가, 이런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되네요. 그런 의미에서 민형님의 지난 궤적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바림[4], Degital[5], Forking Room[6]을 포함한 민형님의 플랫폼적인 실천은 예술과 기술, 때로는 번역이 교차하는 장을 만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바림을 포함한 여러 실험들은 동시대 예술생태에서 쉽게 기록되지 않는 부분을 복원하거나, 제안하려는 시도, 혹은 미적이거나 정치적인 행위로 다가올 때가 있었어요. 이때 동원되는 아카이빙의 감각은 단순히 '저장'이 아닌 어떤 살아있음을 제안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요. 범박한 질문이지만, 민형님께 '아카이브'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저는 사실 영원히 무언가를 저장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도서관이 취급하는 여러 자료 중에 ephemeral(일시적 자료)이 있잖아요. 보통의 서적이 아닌 포스터나 브로슈어와 같은 것을 칭하는데요. ephemeral이라는 단어 자체에 곧 사라진다는 뉘앙스가 있다고 봅니다. 모든 아카이브는 ephemeral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무언가를 영원히 보관한다는 야망이 있는데요.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희생되기도 하죠. 그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아카이브는 미래나 과거가 아닌 지극히 현재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있었고, 이게 남을 것이라는 사실보다는 사라질 것을 알고 있기에 '이걸 남기고 싶다,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을 지금 보라!'는 것이 좀 더 명확한 열망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대단한 아카이브는 피라미드라는 생각이 듭니다.

  1. [4]광주광역시에 위치했던 예술공간 (2014-2024) https://barimart.wordpress.com/
  2. [5]디지털 아트 플랫폼 https://degitalarts.xyz/
  3. [6]포킹룸 https://www.forkingroom.kr/

Q. 흥미로운 말씀이네요. 일시적인 자료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가장 훌륭한 아카이브는 피라미드라고 말씀주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A. 제가 좋아하는 도서관 중에 미국에 있는 Prelinger Library 라는 곳이 있는데, 책이 너무 많은 부부가 만들었어요. 오만가지 책을 집에 쟁여두다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도서관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보통 도서관에서 서적을 분류할 때 쓰는 방법을 쓰지 않고, 미국 서부에서부터 동부 순으로 분류하거나, 미국, 바깥, 우주, 이런 식으로 분류하더라구요. 아카이브에 생명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아카이브를 했고 그 아카이브가 무슨 의미를 남기고 그 아카이브가 기존의 문맥을 어떻게 봤고……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이걸 남겨야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 그래서 흥미로운 도서관이었습니다. 피라미드 같은 것도 미래에 누가 볼 것이고, 역사를 기록하고, 그런 목적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냥 정말 내가 죽어서도 살아있다는 걸 믿는 부분도 있잖아요. 그것이 대문자 A 아카이브라도 생각이 들고.

Q. 그러겠네요. 진짜 말 그대로 대문자 A 아카이브.

A.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할 수는 없겠죠. 돈과 권력이 없기 때문에 우린 그걸 못하겠지만, 우리 같은 미시사에 속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언가를 남기면 좋을까, 라고 생각했을 때 남겨진다는 보장이 없는 거예요. 도서관 안에 들어갈 만한 책을 모든 사람이 쓰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다보면 남긴다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고, 지금 내 현재를 모으는 데 좀 더 중점을 두는 게 제가 생각하는 아카이브인 것 같고, 이 뒤에 남든지 말든지는 사실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카이브는 과거에서 본 시점인가요? 미래에서 과거를 보는 시점이 아카이브일 수도 있죠. 오히려 아카이브는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닐까? 아니 현재를 보는 것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파라오가 아닌 이상은. 최근 뉴욕에서 문학 비평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을 갔는데, 문학 비평이 미술 비평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현대 미술 비평은 나중에 사람들이 그대로 그 작품이나 전시를 못 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나 문학 비평 같은 경우는 원본 책을 웬만하면 누구든 다 볼 수 있다 이거예요. 그 책이 금서가 되어 분서갱유 당하지 않는 이상, 책으로 나왔다는 것, 문학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그 자체가 없어질 일은 거의 없다는 거죠. 그럼 아카이브의 의미가 달라질까요? 모든 것이 타의로 아카이브 되는 지금은 사실 오버 아카이빙의 시대이고, 비평을 떠나 저는 너무 쓸데없는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면 현재에서 좀 더 거르고, 오히려 지우고, 안 남기는 것도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바림이 어떤 공간이고 뭘 했다는 것에 대해서 완벽하게 남겨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남아있지 않아서 미래에 있는 사람들이 이걸 못 본다고 할지라도, 아카이브가 가진 선형성에 크게 빠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의 경우처럼요.

Q. 그렇지요. 어떻게 보면 단순히 남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든 접속하고, 그 안에서 잘 떠나고 머물 수 있는 상태 그 자체를 구현하는 것이 시를 쓰거나 읽고, 또 잊는 일과도 닮아있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요. 무엇보다 민형님의 실천은 종종 플랫폼을 '하나의 시'처럼 다루는 감각을 보여줍니다. 김화용 작가님이 바림 10주년 도록에 쓰셨던 글[7]도 기억이 나고요. 그런 의미에서 바림, 포킹룸, 디지털, 그리고 번역을 비롯한 각종 작업을 관통하는 민형님만의 리듬 혹은 문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보통 이런 것들을 저는 탈중심주의(decentralization)이라고 불러왔습니다[8]. 대학원 때 인터넷의 탈중심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진 데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비트코인 등으로 의미가 좀 달라지긴 했지만, 결국 중앙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는 궤도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중앙에 반발하는 안티테제로 보이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치 중력처럼 결국 모두가 중앙을 거쳐 가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원심력과 구심력처럼, 중앙에서 탈주하는 궤도가 어떻게 다시 중앙에 편입되고, 거기서 또 어떤 푸시를 받아서 또 다른 루트로 뻗어가는지에 대한 실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광주는 그 실험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죠.

Q. 어째서 광주가 가장 적합할까요?

A. 제가 광주에 있으면서 서울과 동등한 위치에서 예술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동등한 위치라는 것도 사실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고, 아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지 뭐 하러 서울이랑 비교를 하냐 그런 얘기를 한 사람도 있었어요. <지큐 코리아(GQ Korea>와 인터뷰할 땐 그러면 끊임없이 서울을 의식하고 계신다는 뜻인 거네요, 라고 역으로 질문도 받았거든요. 그러나 저는 안티 서울 이런 운동을 하기 위해 광주에 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광주를 주류-비주류, 상업-비상업으로 바꿔도 말이 되는데, 모든 것이 중심을 향해, 욕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잖아요. 그렇게 해서 돈도 벌고, 직업도 가지고. 중앙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선천적으로 사람들을 중앙 핵으로 끌어들입니다. 저는 거기서 끌려가지 않겠어 라고 하기보다는 거리를 계속 재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저 자체가 비주류적인, 비상업적인 것을 좋아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리재기를 해온 활동을 대안공간이라고 퉁쳐서 부르는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비상업, 비주류 이렇게 '비'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우리가 그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죠. 그러나 저는 그보다는 모든 사람은 다 중앙으로, 주류로 끌려갈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거리를 재겠다고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Q. 굉장히 흥미로운 말씀이네요. 특히 거리라는 표현이 인상 깊어요.

A. 광주가 거리재기에 적합한 도시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탈중앙주의, 탈중심주의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최소의 지정학>이라는 프로젝트에서 말했던 것처럼 로컬을 단위로 볼 수 없냐고 했던 것도 사실 완전히 똑같은 생각이거든요. 로컬을 단위로 본다면 이걸 좀 다르게 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고, 이걸 잰다면 광주에서 재는 게 의미가 있는 거죠. 광주는 세계사와 미시사가 눈에 띄게 크로스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광주에 막상 살다보면, 광주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일, 예술가로 살아남기 이런 생각에만 매몰될 수밖에 없으니, 그 크로스를 볼 여유가 없기도 해요. 제가 요새 해외에 체류하고 있기에, 잠깐 밖에 나옴으로써 더 잘 보이는 것들도 있네요.

Q. 세계사와 미시사가 눈에 띄게 크로스하고 있다는 말씀에도 공감이 되네요. 제 경우에도 광주 출생에 직업도 이곳에서 가지고, 작업도 여기에서 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광주 바깥에서 광주를 보려고 했던 시도는 <최소의 지정학>에 합류해서 함께 했던 인스타그램 일기쓰기 프로젝트[9]였던 것 같고, 첫 단행본도 그런 요소가 어느정도 반영된 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해주셨던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모든 사람은 중앙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어떻게 보면 삶 자체가 가지는 특이하고도 중요한 속성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문득 들고요.

A. 그렇죠. 우리가 은행을 쓰고 학교에 다니고 그러는 한 어쩔 수 없죠. 한가하게 지방에도 사람살아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닌데. 어쨌든 그것을 재려고 하는 노력, 어디까지 잴 수 있나, 그게 지속 가능한가, 이런 것을 계속 고무줄처럼 재는 거예요. 끊어지기 직전까지. 저는 그런 행위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아이러니한 것은 제가 뉴욕에 잠시 체류 중인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그런 감각을 잃어가는 느낌이에요. 왜냐하면 여기가 너무 중앙이다 보니까 끌려가는 것이 더 과격해요, 그 힘이 저를 너무 지배하고 있거든요. 저도 주관이 뚜렷하고, 뭐랄까 한국인치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아온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니까 너무 많은 것을 중앙의 힘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일이 생기더라구요. 이방인으로서 이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게 중요해서 그런 것 같아요. 한국에 있을 때는 딱히 제가 이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안 했거든요. 여기 오니까 아시아인이고 여자고, 직업이 명확하지 않고, 졸지에 내가 너무 마이너리티 입장에서 돈 안되는 예술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거죠. 여기 와서 보니 그 거리재기 또한 사치라는 생각조차 들어요. 비슷한 이유로 제가 서울을 떠났기에 이런 느낌이 새로운 건 아니지만, 여기가 조금 더 심화된 느낌이 들어요.

  1. [9]<최소의 지정학>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인스타그램 일기쓰기 프로젝트 https://www.are.na/d-ayandmayanddiary/colon-x525bkjpy3m

Q. 어떻게 보면 진짜 완전한 리셋의 시간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광주에서 살아남기에 비해 뉴욕에서 살아남기는 아예 생존의 영역일 것 같다는 생각이. 무지막지한 속도와 빨려들어가는 느낌들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A. 그런데 그게 사람들에게 도파민을 줘서 여기 사람들은 괴로워하면서도 여기를 떠날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중심을 즐기는 사람은 제외하구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중심에 있다, 라는 감각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도쿄에도 오래 살았으니까, 도쿄나 서울에서 살다가 뉴욕에 왔으면 좀 다르게 느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광주에서 10년간 했던 일이 워낙 큐레이터로서 저에게 중요한 활동이었고 저의 DNA에 각인되어있어서, 그래도 난 중앙이 좋아라며 괴로워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에 마냥 동조할 수는 없네요. 만약 10년 후에 저도 그런 사람이 되어있다면, 저는 거리 재기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웃음)

Q. 예전에 웹진 기획에 관해 같이 이야기 나눠보고, 또 자문도 구해보고 그럴 때 릴스, 숏폼 시쓰기 그런 이야기도 잠깐 해주셨잖아요. 요즘은 도시 자체가 릴스나 숏폼처럼 감지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접속하고 머물고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시 쓰기와 릴스 같은 도시는 어떻게 닮았고 다르나, 아무튼 숏폼이라는 말도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겠군, 뭐 그런 인상이 있었습니다.

A. 원래 시를 사람들이 산문이랑 비교해서 이야기할 때, 약간 짧은 형식(숏폼)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물론 짧지 않은 산문시 같은 것도 많지만요. 보통은 시라는 건 짧고 함축적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럼 릴스나 쇼츠는 시일까요?

Q. 그러니까요. 돌이켜보면 사실 저는 시가 짧아서 좋았던 것임을 새삼 밝혀보게 됩니다. 이 웹진의 기획 자체가, 이 혼돈 안에서 나름의 구체성을 만들어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일 수도 있겠어요. <아카이브:노아>는 구체적인 물성으로 쌓여가는 것이든 클라우드와 닮아있는 형태든 간에, '아카이브'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앞에 서 있는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존재론적인 이동 사이에서, 정체성이 만들어져가는 그 모든 과정 안에 과연 시라는 장르가 어떻게 연루되어갈 수 있는지 묻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결국 '노아(Noah)'라는 옛말이 아우를 수 있는 휴식, 휴거의 상태란 일종의 잠정적인 생성 상태겠구나. 혼돈의 세계 안에서 구체성을 회복해가는 시간이기도 하겠다, 그때 시라는 장르가 동원되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기술 기반 예술이나 디지털 협업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적인 언어'에 대한 고민이랄까요. 문득 민형님께서 생각하시는 인간의 언어라는 게 있다면, 어떠한 것일지도 묻고 싶어집니다.

A. 인간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주의, 인간우월주의가 될 수밖에 없을까요. 곧 이 세상이 정말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인간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가 아닌 것으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이나 동물의 지능 등, 다른 지능과 언어에 대해서도 (언어와 지능은 뗄 수 없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시대잖아요. 시는 발걸음이 가볍고, 유동성이 있으며,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특성을 조금이나마 '다른 언어' 번역에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노아의 방주에 실린 것도 인간 뿐만은 아니니까요. 제가 최근에 마테오 파스퀴넬리 교수의 토크를 들었는데, 인공지능을 병리학과 비교하는 토크였거든요. 인간의 정신병을 물리적으로 고칠 수 있다고 믿었던 정신병 치료의 역사와 지금 인공지능을 비교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인간적인 언어라고 할 때 더 이상 그게 굉장히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시대에 와 있는 것 같긴 해요. 예를 들어 침팬지가 우리랑 가진 DNA가 99% 이상 비슷한데 우리 인간은 이렇게 우월하다는 교육을 받잖아요. 그러나 최근 진보 페미니스트나 환경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식물, 개미, 버섯의 언어도 고차원적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리고 결국 인간이 그 대단한 언어로 할 수 있는 끝판왕이 챗GPT 같은 것이라면 저는 이런 인간적인 언어에 대한 실망이 있단 말이에요. 그동안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말을 안 했으면 몰라도. 인간이 가진 언어에 노벨상을 주고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것을 딱히 폄하하자는 건 아닌데, 어디까지 영웅시할 수 있을까요? 챗GPT 에게 노벨상을 줄까요? 안준다면 왜? 인간의 언어가 퇴화하기도 하고, 유행어도 생기고 사라지는 와중에, 비인간의 동물과 생물, 식물의 지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면 그사이의 번역에도 고민해 봐야 하는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더 비인간적인 것을 찾아야지 인간적임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명한 예술가는 대부분 서구권 백인 남자가 많은데, 그들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다른 것들은 묻혔다는 얘기잖아요. 따지고 보면 많은 인간의 언어가 이미 묻혔다는 건데 그렇다면 우리가 기존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Q.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팀 잉골드의 『조응』(2024, 가망서사)이라는 책도 생각나요. 그리고 최근에 나온 시집들의 경향에 대해서도요. 거대한 귀에 가까운 것이 되어가는 언어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단순히 누적하듯이 데이터로 만드는 것에 급급한 언어가 아니라, 말하는 행위로 오히려 비워내는 과정을 수행하는 언어도 있을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지나갈 수 있는 길목을 닮은 언어, 플랫폼이 되거나 지나가는 길로 작용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네요. 민형 님께는 번역의 감각과 플랫폼 운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여쭙고 싶어요. 단순한 언어 간의 변환이 아니라, 말들의 분기와 파생, 맥락을 다른 언어로 옮기거나 구성하는 과정 안에서 체득되는 감각들이 궁금합니다.

A. 번역가나 통역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100%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의역을 많이 해서라도 고차원적인 의미를 전달하려는 사람이 있고, 원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후자인 것 같아요. 번역가나 통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없어야 그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이 됩니다. 전에 부산에 위치한 공간 힘에서 강의할 때 제 강의 제목이 '성공한 스파이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였는데요. 모든 사람이 이름을 남기려고 애를 쓰는 이 업계에서, 어떻게 성공한 스파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크레딧을 적지 않는다는 그런 문제는 아니고요, 이음매가 없는, 마치 로봇 청소기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턱이 없는, 그런 연결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요. '아카이브'처럼요.

Q. 너무나 프로페셔널하다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민형님께서 앞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플랫폼의 형태가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물론 플랫폼이 아닌 다른 일들을 시작하거나, 이미 시작하고 계실 수도 있겠지만요. <아카이브:노아>와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앞으로 민형님께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지금 저는 조금 긴 아르바이트로 뉴욕에 있는데요. 중심 그 자체에 와있죠. 이 사실이 저를 지치게 하고 있어서 지치지 않기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여기서도 모두 젠더, 인종, 계급 등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저는 생각하는 거죠.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제 방황이 끝나면, 예술에 딱히 희망을 가지지는 않으면서 여전히 우리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플랫폼을 광주에 다시 만들고 싶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미얀마 사람들이, 티베트나 오키나와 사람들이 단 한 곳에 와서 모두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곳이 항상 뉴욕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뉴욕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이곳이요. 이런 돈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도 돈이 붙는 것이 이 도시의 본질이라는 아이러니도 1+1처럼 따라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아직도 어둠에서 홀로 외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곳이 광주라면, 이 이야기를 광주에서는 조금 다르게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그것은 '지속 가능'할지 '아카이브'가능할지,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