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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홍유찬

2007년 광주 출생.

비선형적 텍스트와 이미지의 부조리를 동경하며, 사람의 감정에 부합하는 영상을 얻고자 노력함.

존경하는 예술가로 카프카, 벡신스키, 로이 안데르손 등이 있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 <Blue, 2018>

나는 헤르만 헤세가 <밤의 사색>에서 "깊은 심심함"에 대하여 고백한 몇 가지 진실을 꺼내보곤 한다. 우선, 그것이 "무위"이며, 무위는 곧 깊은 심심함이고, 그 깊은 심심함은 휴식의 것으로 환원된다. 우리의 시간은 심심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왔지 않은가? 누군가 "더 해야 해" 또는 "휴식은 밥을 먹여주지 않아"라며 거듭 무위를 거부하고, 우리 삶에 제공된 가능성의 범위를 권태로 제한하고 심심함의 위력을 간과한다면, 나는 그에게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런 이는 무슨 말을 해도 제 갈 길만을 간다. 탓하지 않는다. 나는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무위 아래 잠재된 자신을 찾아냈으면 하는 까닭이다. 내게 그것은 물론 영화였다. 영화는 가능성의 범위가 넓은 매체로, 우리 모두가 부르는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 <메모리아>는 그런 뜻에서 무위의 마법을 영화적으로 포착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혼의 자기 수양이 - <징후와 세기>의 "차크라"와 같은 형태로 - 관조되는 본작은 영화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찬탄할 만하다. '제시카'는 어느 날 듣게 된 쿵, 하는 익숙한 소음을 듣고,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녀의 모험이 지속될수록 그녀 안에 있던 기존의 기억은 타인이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되고, 급기야 그녀와 친밀한 관계였던 사운드 디자이너 청년 '에르난'이 존재하지 않는 이가 되기도 한다. 제시카는 정신적으로 취약해진 상태에서 근원을 찾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끝에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에르난'인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던 그와는 다른 모습으로. 늙은 중년의 에르난은 자신을 외계인으로 소개하고, 콜롬비아의 한적한 정글에서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말을 건넨다. 제시카는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가 요하는 철학이 모습을 드러낸다. 에르난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기에 기억의 경험을 중단하고, 그 정글에 남아 "휴식" 속에 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Memoria, 2021>

그는 제시카에게 자신의 그러한 휴식의 잠에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씬은 여러 모로 기이하다. 그는 눈을 뜨고 잔다. 단순히 외계인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며 잠에 드는 것이다. 제시카는 그런 에르난과 대화를 통해 무위에 취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쿵, 하던 소음이 에르난의 기억이었단 걸 알게 된다. 에르난에게 그 기억을 들려주고, 자신의 것인 양 울게 되는 제시카의 모습은 얼핏 영화가 이끄는 감정과 동화되어 감동케 되는 관객의 모습처럼이다. 에르난은 말한다. "나는 데이터 장치 같고, 당신은 안테나 같네요."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나서던 제시카가 정글 안 무위와 휴식의 공간에서 마침내 어떤 감정을 깨닫게 되는 것, 에르난이 소중한 기억을 지키기 위해 휴식의 삶을 취하며 살아가던 것은 무위의 마법을 부르고 있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다가도, 무위는 결국 자동적으로 당신에게 찾아온다.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현저히 당신의 몫이지만, 찾아 헤매던 그 권태와 피로가 너그러운 심심함에 의해 치유되고, 그것이 "영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그 누구의 것이든 될 수 있는 경험의 가능성 아래 서로를 잇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