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형
호텔노동자와 잡지노동자를 거쳐 영화노동자로 일하며 예술영화관을 운영하고 한국독립영화를 배급했다.
에세이집 [오래전, 오래된 극장에서](2024, 플레인아카이브)를 썼다.
영화를 가질 수 있을까?

마틴 스코세이지,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 1976) ©컬럼비아 픽쳐스
영화를 가질 수 있을까? 영화를 연출한 감독만이 그 영화를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역시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가 영화의 주인일까? 폐관한 극장 창고에서 오래전 소실된 35mm 필름을 우연히 발견한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영화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꼭 영화를 가져야 할까? 과연 가질 수 있기나 한 걸까?
대부분 대여 형태로 이뤄진 VHS 시장이 저물고, DVD를 필두로 개인 물리매체 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영화주간지 [필름 2.0]이 DVD 전문 월간지 [DVD 2.0]을 펴낸 시기는 2002년 5월이었다. 창간호의 부록은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DVD였다.- 자연스럽게 나도 좋아하는 영화의 DVD를 하나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 비디오를 잠깐 대여하거나, 극장 안에서 한정된 시간 동안 영화를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감격이 있었다. 이 영화가 온전히 내 것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대형서점마다 자리했던 DVD 코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희귀한 타이틀을 찾는 데 몰두했다.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타이틀이 아직도! 수두룩하지만, 그것들이 여전히 방 한가운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늘 좋았다. 플라스틱을 딸깍하고 여닫는 킵케이스보다는 두꺼운 종이를 덧대 펼침면에 영화의 스틸이나 상징적인 이미지로 디자인한 디지팩 타이틀을 특히 더 아꼈다. 패키지를 펼쳐보는 것만으로 영화 속에 잠깐 다녀온 듯한 감각을 다시금 깨워주는 <펀치 드렁크 러브> 디지팩 에디션은 귀퉁이가 닳도록 열어본 것 같다. 뚜껑을 열면 주인공들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오는 <오즈의 마법사> 팝업 스페셜패키지도 자주 열어봤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모든 시즌이 구두상자 모양의박스에 담긴 패키지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들을 가졌을까? 적어도 가졌다는 착각에 빠지게는 해줬다.
DVD 우편 대여 서비스로 출발한 넷플릭스가 온라인 스트리밍을 시작한 건 2007년이었다. 개인 물리매체와 스트리밍 서비스가 공존한 잠깐의 시간이후 본격적인 OTT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나 역시 DVD와 블루레이를 거의 구매하지 않게 됐다. 물리매체를 가지고 있는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도, 일단 구독하고 있는 플랫폼에 있는지부터 찾아본다. 리모콘 하나로 간편하게저장된 데이터를 호출하는 것이다. 물리매체를 틀려면 타이틀을 찾고, 케이스를 열고, 플레이어를 켠 후, 디스크를 넣고, TV의 외부입력을 바꾸고... 고작 이 정도의 일이 어쩌다 수고로움이 되었을까. 한 편의 영화를 위해서만 저장된 물건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애틋하지만, 실제로는 자주 꺼내 보지 않게 된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OTT에 익숙해지면서 언제부턴가 마음 역시 간편해졌다. 내가 이 영화를 온전히 가졌다는 거창함보다는 영화를 보고 치운다는 느낌이 든달까. 파일로 압축된 영화는 영원을 약속하지만 –당신이 구독을 멈추지 않는다면!- 무언가 가볍게 휘발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게 착각일지라도 꼭 가져야만, 만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블루레이부터 각본집, 콘티집, 전단지, 티켓, 영화의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굿즈까지 가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감상이 끝났음을(어쩌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기념하는 최후의 로맨티시스트들. 어떤 이에겐 그저 쓰레기일지 모를 물건들을 애타게 찾고 모으며 물성의 부피를 기쁘게 감당하는 사람들.
최근 내 공간의 부피를 채우는 물건들은 단연코 옷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소위 빈티지, 구제, 중고품으로 불리는 헌옷들이다. 우선 헌옷의 장점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백화점이 없는 도시에도 헌옷 가게가 있으며, 백화점이 있는 도시에는 훨씬 많은 헌옷 가게가 있다. 고가의 하이엔드 브랜드 빈티지를 다루는 상점부터, 미국과 일본의 특정 시기나 아이템을 다루는 상점, 뒤죽박죽 모든 것이 한데 섞인 곳까지, 어디에나 있지만 어느 하나 같은 곳은 없다. 상점마다 고유한 분류법에 따라 빼곡하게 걸려있는 옷들 사이를 유영하는 것이 최근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것들이 대부분 쓰레기에서 온다는 점도 마음에 드는 쪽이다. 철마다 옷을 사고 버리는 생활 패턴으로, 혹은 이별이나 재수없는 일에 대한 분풀이로, 때로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버려진 옷들은(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헌옷엔 귀신이 붙었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해도 그 점 역시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해외로 팔려가기도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상당수의 옷들은 전국의 헌옷 가게로 흩어지고 다시 새롭게 모인다. 가격이 주인 마음대로 정해진다는 점도 재밌다. 오래전 마틴 마르지엘라가 있던 시절의 마르지엘라를 비싼 값에 매기는 주인이 있다면, 그건 그저 오래된 옷일 뿐이라며 상태가 좋은 존 갈리아노의 마르지엘라에 더 비싼 값을 매기는 주인도 있다. 대개 거래는 서로 생각한 가치가 다를 때 이뤄진다.
어디에 뭐가 있을지 전혀 모르는, 사실 뭘 찾는지도 모르겠는 심정으로 헌옷을 뒤지고 뒤지다가 나름의 분류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수많은 영화를 갖고 싶었듯, 그 영화 속엔 수많은 옷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를 들어 <택시 드라이버>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트래비스 비클의 옷들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상중 하나일 것이다. 킹콩컴퍼니 패치가 붙은 탱커 재킷이 M-65 필드재킷으로 바뀌는 순간은 영화의 발화점이기도 하다. 로버트 드니로가 영화 속에서 착용한 이 군용 재킷들은 모두 트래비스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온 군인이라는 설정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가 여전히 유효한 클래식으로 남았듯, 트래비스의 의상들도 여전히 회자되고 복각되고 거래된다. 트래비스의 탱커 재킷과 M-65 재킷은 디테일에 따라 가격대가 10만원대부터 200만원대까지 여러 브랜드들을 통해 복각됐다.(위 아 더 피플 뱃지까지 포함해 판매하는 브랜드도 있다.) 재킷들 뿐만 아니라 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커다란 스톤이 박힌 가죽벨트까지 로버트 드니로가 영화 속에서 착용한 대부분의 옷들이 복각되어 판매된 바 있다. 디자인과 원단은 물론이고, 재봉 방식, 당시 사용된 지퍼와 같은 부자재까지 최대한 영화 속 의상과 시대까지 재현하려는 몇몇 복각 브랜드들의 집요함은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을 어느 기차역 앞의 헌옷 가게에서 끈질기게 찾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저 여기저기에 버려진 아름다움을 줍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소피아 코폴라,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 2006) © 컬럼비아 픽쳐스
너무 많은 헌옷들을 만지다보니 처음엔 디깅용 장갑을 사서 껴보기도 했지만, 역시 손으로 직접 넘겨보고 만져봐야 소재의 촉감부터 모든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전국의 옷걸이를 횡단하다보면 영화의 개봉을 기념해 만들어진 홍보용 티셔츠 같은 것들을 만나는 날도 있고, 영화 촬영 현장 스태프들에게 지급된 스태프복을 만나기도 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경우처럼 아이코닉한 영화 의상을 복각한 것들, 라프 시몬스나 언더커버처럼 상당수의 컬렉션이 영화를 영감삼아 발표된 것들도 있다. 또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보라색 하이탑 컨버스와 <파묘>의 화이트 컨버스 로우처럼 익숙한 기성 제품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들도 따로 분류하게 됐다. 그리하여 영화를 가질 수 있을까? 착각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