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경
재즈애호가 겸 용봉동 한석규, 재즈월간지 엠엠재즈 필진, 지니뮤직 비정기 기고.
삶의 물성, 노래에서 만져지는 것들
원고 의뢰를 받았을 때, ‘물성’ 내지는 ‘감각 가능한 실재’는 제게 약간 곤혹스러운 주제였습니다. 오랜 시간 음악을 들었지만, 음악과 위의 주제를 연결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감각 가능한 실재를 ‘음악을 들으며 삶을 느끼는 게 가능한가?’로 바꿔 부르기로 했습니다. 일단 이 짧은 글이 독자의 손에 잡히는 글이어야 하겠습니다. 그저 읽다가 허공에 흩어져버린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이 없겠네요. 실재와 허공의 거리를 줄이며 최근 저에게 있었던 음악 이야기를 해볼게요.
몇 달 전에 친구 집에서 가벼운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친구 두 명(아저씨 두 명)은 요즘 이 노래가 좋다며 블루투스를 연결해 틀어주었어요. 기타 반주에 약간 허스키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A파트의 가사는 다음과 같네요.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잠깐 듣다가 친구들에게 한마디 했어요. <나는 이 노래 못 듣겠어.>
제 말을 들었던 친구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을 겁니다. 친구들을 불편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고,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가감 없이 제 생각을 편하게 말했습니다. 친분이 없는 사람들과의 자리였다면 저는 <아, 이런 노래도 있네요.> 정도로 응대하고 말았을 겁니다.
위 노래는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입니다(원곡 : 중식이밴드의 정중식). 이 곡에 작∙편곡이나 창법 같은 미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음악은 제가 다루는 영역이 아니고,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최근에 저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이유를 저는 한 단어에서 찾습니다. <벌레> 그리고 제가 이 노래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도 저 단어에서 기인합니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요.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스스로가 더없이 초라하고, 납작해질 때 말이죠. 사람에 따라 빈도는 다르겠지만,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아마 대인이나 대물, 돈에 관한 문제가 그 이유이겠죠. 삶에 좌절하고 낙담한 자를 위한 노래, 어찌 보면 지치고 피곤한 세상에서 저만한 노래도 없을 듯합니다.
다시 한번 가사를 옮깁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짧은 가사에서 대책 없는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널을 뜁니다. 청승이나 신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렇게 노골적인 자기비하의 단어를 써야 하는가, 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퇴행하는 존재라지만, 저렇게 퇴행적일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에 위로를 받았으니 이 노래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일까? 그럼에도 저는 이 지면을 통해 한번 묻고 싶었습니다. 한 가수와, 세상 사람들이 삶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이 저것뿐이었는지.
대중음악의 가사에서 은근함 혹은 섬세한 마음의 결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람의 복합적이고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좋은(?) 가사는 이미 추방되어, 좋은 가사의 노래를 들으려면 이소라의 노래(쉼, 바람이 분다)를 꺼내 들어야 할까요. 어쩌면 저는 여전히 가사의 힘을 믿는 옛날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에드워드 양, <하나 그리고 둘>( A One and a Two (Yi Yi) / 2000) ©리틀빅픽쳐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최근에 에드워드 양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이 재개봉하였습니다. 저는 10년 전쯤 처음 보았는데, 워낙 좋아하는 영화라 극장이든 DVD든 여러 번 보았고, 이번에도 또 챙겨보았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는 많지만, 유독 이 영화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제가 이 영화에서 삶의 의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알았던 삶, 제가 몰랐던 삶을 동시에 발견했습니다. 살면서 느끼는 것보다 이 영화에서 느끼는 것들이 더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삶보다 더 큰 영화라고 제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음악도 그런 음악이 있습니다. 20대 때부터 좋아한 재즈보컬리스트 셜리 혼, 그 당시에, 그저 음악을 많이 듣는 게 중요해 닥치는 대로 들었고, 음악이 좋으면 그 음악이 왜 좋은지도 모르고 들었습니다. 그저 온통 음악에 허기진 상태였으니까요. 시간이 지나 이제는 음악을 음미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삶의 의미도 물을 수 있다면 더할 게 없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셜리 혼의 92년 작 <Here’s to life>의 동명 타이틀곡 ‘Here’s to life’의 가사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 No Complaints | 불만도 |
| No Regrets | 후회도 없어요. |
| I still believe in chasing dreams | 난 여전히 꿈을 좇고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믿어요. |
| But I have learned | 당신이 주는 모든 건 |
| That all you give | 당신의 전부라는 것을 |
| Is all you get | 알게 됐어요. |
| So give it all you've got | 그러니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세요. |
| 중략 | 중략 |
| But there's no yes in yesterday | 하지만 어제엔 정답이 없어요. |
| And who knows what tomorrow | 내일 무슨 일이 |
| brings Or takes away |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
| As long as I'm still in the game. | 사는 동안, |
| I want to play | 난 그저 게임을 하고 싶어요. |
| For laughs | 웃기 위해, |
| For life | 살기 위해, |
| For love | 사랑을 위해 |
| So here's to life | 그래요. 여기 삶이 있어요. |
‘Here’s to life’에서 어렴풋이 삶을 감각합니다. 삶보다 더한 음악이 있다고 느낍니다. 삶이 실재인지, 음악이 실재인지 저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당신께 조금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셜리 혼의 목소리를 소박한 마음으로 건넵니다.
※ 셜리 혼(Shirley Horn) 추천 음반 1. Close Enough for Love(Verve, 1988) 2. Here’s to life(Verve, 1992) 3. Loving You(Verve, 1997)